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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 한 명이 몇 달째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 때, 저는 솔직히 그냥 일이 많아서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계단 몇 칸에 숨이 차고, 손발이 늘 차갑고, 얼굴색도 묘하게 창백한데 본인은 "원래 체력이 약해"라며 넘겼습니다. 그런데 건강검진에서 혈색소 수치가 낮게 찍혔고, 결국 철결핍성 빈혈 진단을 받았습니다. 빈혈은 단순히 기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몸 어딘가에서 보내는 신호입니다.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충분한 기간 동안 치료해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빈혈 원인, 생각보다 훨씬 다양합니다
많은 분들이 빈혈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철분 부족을 떠올립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자료에 따르면, 빈혈은 적혈구가 모자란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병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빈혈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원인 질환이 따로 있고, 그것을 찾는 것이 치료의 시작입니다.
실제로 전 세계 인구의 약 27%가 빈혈 상태라는 통계가 있습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WHO)). 그중 70% 이상이 철결핍성 빈혈이긴 하지만, 나머지 30% 가까이는 원인이 다릅니다. 저는 처음에 이 숫자가 꽤 크게 느껴졌습니다. 무작정 철분제부터 먹는 분들이 주변에 많은데, 원인이 다른 빈혈에 철분제를 먹어봤자 좋아지지 않습니다.
빈혈의 원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적혈구 생성이 줄어드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적혈구 파괴가 늘어나는 경우입니다. 생성이 줄어드는 대표적인 원인으로는 철결핍성 빈혈 외에 거대적아구성 빈혈이 있습니다. 거대적아구성 빈혈이란 비타민 B12나 엽산이 부족해서 적혈구가 정상보다 크고 미성숙하게 만들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혀가 유독 아프거나 손발 저림이 심하다면 이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파괴가 늘어나는 쪽에는 용혈성 빈혈이 있습니다. 용혈성 빈혈이란 적혈구가 정상적으로 만들어지지만 면역 이상이나 선천적 결함 때문에 일찍 파괴되어 버리는 상태입니다.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PNH)처럼 희귀한 질환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런 경우는 철분제로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빈혈이 생겼을 때 원인 확인이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 철결핍성 빈혈: 철분 저장고가 바닥나면서 적혈구 생성 감소
- 거대적아구성 빈혈: 비타민 B12 또는 엽산 결핍으로 적혈구 미성숙
- 만성 질환에 의한 빈혈: 암, 류마티스, 신장 질환 등에서 기능적 철결핍 발생
- 용혈성 빈혈: 적혈구 파괴 증가로 발생, 원인이 다양하고 희귀한 경우도 있음
- 재생불량성 빈혈: 골수에서 조혈모세포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
철결핍성 빈혈, 어디서 왜 생기는 걸까요
가임기 여성, 임산부, 성장기 청소년, 그리고 노인. 빈혈이 특히 많이 생기는 집단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가임기 여성의 철결핍성 빈혈 유병률은 상당히 높고, 반대로 40대 이전 남성은 1~2% 수준으로 낮습니다(출처: 질병관리청). 그래서 남성에게 빈혈이 생겼다면, 단순히 영양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철결핍성 빈혈의 가장 흔한 원인은 출혈입니다. 여성의 경우 월경 출혈이 많은 편이라면 당연히 철분 소실이 커집니다. 그런데 40대 이후 남성이나 폐경 후 여성에서 철결핍성 빈혈이 생겼다면, 위장관 출혈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제가 인상 깊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빈혈 때문에 내원한 환자에서 위암이나 대장암이 발견되는 경우가 실제로 있기 때문에, 40세 이후 철결핍성 빈혈은 위대장 내시경을 꼭 받아야 한다는 전문가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철분이 부족해지는 과정도 단계적입니다. 처음에는 페리틴(ferritin) 수치가 떨어집니다. 페리틴이란 우리 몸 안에 저장된 철분의 양을 반영하는 수치로, 쉽게 말해 철분 창고가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저장고가 바닥을 친 다음에야 비로소 혈색소가 떨어지고 빈혈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철결핍성 빈혈이 생겼다는 건 이미 철분이 꽤 오래, 꽤 많이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증상은 피로, 어지러움, 심계항진(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 손발 저림, 창백함 등이 대표적입니다. 제 가족도 이 증상들을 고스란히 겪었는데, 체질이나 스트레스 탓으로만 돌렸습니다. 이런 분들이 주변에 정말 많을 것 같습니다. 심계항진이란 심장 박동이 빠르거나 강하게 느껴지는 상태를 말하는데, 빈혈이 심해지면 적혈구가 산소를 제대로 운반하지 못해서 심장이 보상 반응으로 더 빠르게 뛰게 됩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무조건 심장 문제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치료 방법, 수치가 좋아졌다고 끊으면 안 됩니다
제 가족이 치료받을 때 가장 놀랐던 부분이 바로 치료 기간이었습니다. 철분제를 시작하면 혈색소 수치는 대략 두 달 안에 정상 범위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여기서 치료를 멈춥니다. 수치가 좋아졌으니까 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혈색소가 회복됐다고 해서 철분 저장고인 페리틴까지 채워진 것은 아닙니다. 저장고를 다시 충분히 채우려면 6개월에서 12개월까지 치료를 이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료 방법은 경구형 철 제재와 주사형 철 제재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경구형, 즉 먹는 철분제는 식전 복용이 원칙이지만 소화기계 부작용이 문제입니다. 오심, 더부룩함, 변비가 생기기 쉬워서 꾸준히 복용하기가 생각보다 힘듭니다. 최근에는 고농도 정맥주사 철 제재가 많이 발전해서, 3개월 치 경구 복용량에 해당하는 철분을 한 번 주사로 보충할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소화기 부작용이 심한 분들에게는 주사제가 훨씬 현실적인 선택지입니다.
빈혈 수치가 아무리 낮아도 수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혈압 저하처럼 생명 징후가 흔들리는 응급 상황이 아닌 이상, 철결핍성 빈혈에서 수혈은 최후의 수단입니다. 음식으로 해결하려는 분들도 있는데, 1,000mg의 철분을 보충하려면 소생간을 12kg 이상 먹어야 하고 그것도 다 흡수되지 않습니다. 시금치나 콩류처럼 비헴철이 많은 식품은 흡수율이 더 낮습니다. 빈혈이 이미 생긴 상태라면 식이 조절만으로는 교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 명심하셔야 합니다.
만성 질환자나 암 환자의 경우에는 기능적 철결핍이 문제가 됩니다. 기능적 철결핍이란 몸 안에 철분이 충분히 저장되어 있는데도 염증 반응 때문에 철분이 골수까지 이동하지 못하고 막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경구 철분제가 효과가 없고, 고농도 정맥주사 철 제재를 사용해야 교정이 가능합니다. 암 환자의 약 70%가 이런 기능적 철결핍 상태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 수혈로만 해결하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난 접근이 필요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빈혈이 있으면 무조건 철분제를 먹으면 되나요?
A. 그렇지 않습니다. 빈혈의 원인이 철결핍이 아닌 경우가 30% 가까이 됩니다. 원인을 확인하지 않고 철분제를 먹으면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정작 치료가 필요한 원인 질환을 놓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혈액검사로 원인을 먼저 파악하셔야 합니다.
Q. 철분제 먹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끊어도 되나요?
A. 혈색소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약 두 달이 걸리지만, 체내 철분 저장고(페리틴)를 채우려면 6개월에서 12개월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수치만 보고 일찍 끊으면 저장고가 빈 채로 남아 빈혈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으니, 반드시 전문가와 상의하며 종료 시점을 결정해야 합니다.
Q. 남성인데 빈혈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냥 철분제 먹으면 되나요?
A. 40대 이전 남성에서 빈혈 유병률은 1~2% 수준으로 매우 낮습니다. 그래서 남성에게 빈혈이 생겼다면 위장관 출혈 등 다른 원인을 적극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40세 이후라면 위대장 내시경을 통해 위암이나 대장암 여부를 반드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Q. 빈혈 증상이 없으면 치료 안 해도 되나요?
A. 증상이 없어도 빈혈은 반드시 교정해야 합니다. 혈색소 수치와 증상의 정도가 항상 비례하지는 않아서, 수치가 낮아도 증상을 잘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빈혈 체질"이라고 넘기는 것은 잘못된 상식이며, 장기적으로 심장과 조직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Q. 시금치나 고기를 많이 먹으면 빈혈이 나아지지 않나요?
A. 이미 철결핍성 빈혈이 생긴 상태라면 음식만으로는 교정이 어렵습니다. 1,000mg의 철분을 식품으로 보충하려면 소생간을 12kg 이상 먹어야 할 만큼 비효율적이고, 시금치 같은 식물성 식품의 비헴철은 흡수율이 더 낮습니다. 예방 차원에서의 식이 관리는 도움이 되지만, 치료는 철분제나 주사제를 통해 해야 합니다.
결론
가족이 빈혈 진단을 받던 그 시점을 돌이켜보면, 저는 너무 늦게 눈치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로, 숨참, 손발 차가움을 그냥 흘려보낸 시간이 몇 달이었으니까요. 빈혈은 "기운 없는 상태"로 가볍게 볼 게 아니라, 몸이 보내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빈혈이 있다고 다 철분 부족이 아닙니다. 원인을 먼저 확인하고, 철결핍이 맞다면 충분한 기간 동안 페리틴이 정상화될 때까지 치료를 이어가야 합니다. 40세 이후에 처음 생긴 빈혈이라면 위대장 내시경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피곤함이 길어진다 싶으면 먼저 혈액검사부터 해보시는 게 시작입니다.